ERA로 줄세우면 이렇다
먼저 익숙한 ERA(평균자책점, 9이닝당 내준 자책점) 순서다. 곽빈 3.26, 김진욱 3.48, 나균안 3.53, 원태인 3.68, 오원석 5.25. 오원석만 5점대로 처지고 나머지 넷은 3점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ERA만 보면 "오원석은 부진, 나머지는 비슷하게 잘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ERA에는 수비수가 잡아줬는지, 주자가 운 좋게 묶였는지까지 섞여 들어간다. 투수 본인의 실력만 떼어 보려면 다른 지표가 필요하다.
FIP로 다시 줄세우면 순위가 뒤집힌다
FIP(수비 무관 평균자책)는 투수가 직접 통제하는 삼진·볼넷·피홈런 세 가지만으로 계산한다. 수비와 운을 걷어낸, ERA보다 한 겹 더 '진짜'에 가까운 숫자다. 아래는 5인의 시즌 누계와 추정 FIP를 나란히 둔 표다.
| 선수 | ERA | 추정 FIP | K/9 | WHIP | 이닝 | 승-패 |
|---|---|---|---|---|---|---|
| 곽빈 두산 | 3.26 | 2.36 | 11.1 | 1.34 | 60⅔ | 3-3 |
| 원태인 삼성 | 3.68 | 2.89 | 7.5 | 1.29 | 51⅓ | 2-4 |
| 오원석 KT | 5.25 | 3.07 | 8.2 | 1.42 | 58⅓ | 4-4 |
| 김진욱 롯데 | 3.48 | 3.97 | 7.1 | 1.19 | 64⅔ | 3-3 |
| 나균안 롯데 | 3.53 | 4.01 | 7.5 | 1.32 | 63⅔ | 2-5 |
데이터: KBO 공식 2026-06-09 기준. FIP는 (13×피홈런 + 3×볼넷 − 2×삼진) ÷ 이닝 + 상수 공식에 리그 상수 약 3.10을 적용한 Dualbat 추정치다. KBO 공식 FIP가 아니므로 절대값보다 ERA와의 방향 차이를 보는 용도다.
순위가 뒤집힌다. ERA로 4등이던 원태인이 FIP 2.89로 2위로 올라오고, ERA 꼴찌 오원석은 FIP 3.07로 3위까지 뛴다. 반대로 ERA 2·3위였던 김진욱(3.97)·나균안(4.01)은 FIP 기준 하위권으로 내려간다. 같은 5명, 같은 시즌인데 어떤 지표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온다.
곽빈 — ERA·FIP 모두 1위, 군말 없는 토종 에이스
곽빈은 ERA 3.26·FIP 2.36 둘 다 1위다. K/9 11.1은 외국인 에이스(올러 9.8·알칸타라 8.1)까지 추월한 KBO 전체 최상위권. 삼진을 많이 잡고(피출루 억제) 피홈런이 3개뿐이라 FIP가 ERA보다 0.9나 낮다. 이건 "운으로 ERA가 좋은" 게 아니라 실력이 ERA보다 더 좋다는 뜻이다. 5인 중 유일하게 ERA·FIP 양쪽에서 1위인, 이견 없는 토종 에이스.
오원석 — ERA 5.25의 함정, 6월 반등 1순위
이 글의 핵심이다. 오원석의 ERA 5.25만 보면 "올해 망했다"가 결론이다. 그런데 FIP는 3.07 — 무려 ERA보다 2점 이상 낮다. 삼진(K/9 8.2)은 평균 이상, 볼넷은 5인 중 가장 적은 편(BB 13)이고 피홈런도 5개로 보통 수준이다. 즉 투수가 통제하는 영역은 멀쩡한데 맞은 타구가 안타로 너무 많이 둔갑한 것(BABIP 불운). 이런 유형은 시즌이 길어지면 ERA가 FIP 쪽으로 끌려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6월 이후 반등 1순위 후보.
김진욱·나균안 — ERA는 좋지만 피홈런이 숙제
두 롯데 선발은 정반대다. ERA(3.48·3.53)는 준수한데 FIP(3.97·4.01)가 더 높다. 공통 원인은 피홈런 8개(곽빈·원태인·오원석은 3~5개). 솔로면 1점이지만 주자가 있으면 한 방에 ERA가 흔들린다. 지금까지는 수비·운이 받쳐줘 ERA가 FIP보다 좋게 나왔지만, 그 운이 빠지면 ERA가 4점대로 오를 수 있다는 경고. 김진욱의 WHIP 1.19(5인 최저)는 분명한 강점이라, 장타만 줄이면 FIP까지 따라온다.
한국어로 풀면
ERA는 '결과 점수', FIP는 '투수가 한 일'에 가깝다. 둘이 벌어지면 그 차이를 만든 게 수비·운이다. 곽빈처럼 FIP가 ERA보다 낮으면 "실력이 결과보다 좋다", 오원석처럼 그 격차가 크면 "결과가 운에 짓눌렸다 → 반등 여지", 김진욱·나균안처럼 FIP가 ERA보다 높으면 "지금 결과에 운이 보태졌다 → 하반기 주의"로 읽으면 된다.